MMA

[스크랩] 1월의 파이터- Mirko

고요한하늘... 2005. 3. 31. 23:17
궁극(窮極)의 초음속 하이킥, Mirko “Cro-cop” Filipovic!



안녕하세요? MFIGHT 이민우 기자 입니다.

2005년 ‘이 달의 파이터’ 첫 코너를 장식할 주인공을 누구로 선정할지 고민을 거듭하다 다소 늦어지게 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랜 고민 끝에 선정한 ‘2005년 1월의 파이터’는 바로 Mirko “Crocop” Filipovic 입니다. 팬만큼이나 안티팬도 많은 Crocop! 이 선수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자, 그럼 바로 들어가 볼까요?




Mirko “Crocop” Filipovic(이하 크로캅)는 1974년 9월 10일, 크로아티아의 한 작은 마을인 프리브라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크로캅의 고향인 프리브라카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에서 기차를 타고 세 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주하고 있는 주민이래 봤자 총 삼천 명도 되지 않는 시골 마을입니다. 어린 시절 닌자를 좋아해서 표창을 던지는 슈리켄(Shuriken, 手裏劍) 놀이나 볏짚치기 등을 즐겨 하던 소년 크로캅은, 열한 살 때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장 클로드 반담이 출연하는 액션영화를 접하게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들 모습에 깊이 매료되어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강한 격투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슈왈츠제네거나 반담처럼 좋은 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열한 살 소년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와 동네 철길을 따라 6Km씩 러닝을 하고, 또 러닝을 마친 후에는 빈 깡통에 시멘트를 채워 만든 바벨을 들어 올리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고 하니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맞는 말인가 봅니다. 크로캅은 “지금도 전 시합 전에는 집 앞에서 일직선으로 늘어선 레일을 따라 달립니다. 싸우기 전의 의식이라고 할까요. 유명한 격투가가 되고 국회의원이 된 지금에도 동네 소꿉친구들을 만나 그 때를 이야기하고 카드 놀이를 즐기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이유는 이 곳이 바로 제 고향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마을 사람들은 이십여 년 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달리던 소년 크로캅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하네요.

묵묵히 혼자만의 트레이닝을 거듭하던 크로캅이 본격적으로 격투에 관한 훈련을 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 인근 마을에 있던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언젠가 크로캅이 “보이지 않는 나의 하이킥에는 태권도의 흔적이 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자신이 처음으로 접했던 타격기가 바로 태권도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지요. ‘태권도의 실전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요즘 같은 때이기에 크로캅의 한마디가 더욱 와 닿는 느낌이네요. 스포츠 태권도의 단점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권도’ 자체를 부정하거나 격하시키는 일은 적어도 우리나라 격투 팬 사이에서는 없었으면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다시 돌아와서, 태권도 도장을 다니면서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받던 크로캅은 일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운동을 중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1991년 6월, 이른바 ‘크로아티아 내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지요. 격투가로서의 꿈을 키워가고 있던 크로캅은 트레이닝을 중단하고 특수부대에 지원 입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5년여에 걸친 이 전쟁은 소박했던 한 청년의 인생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크로아티아 내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나라지만 동구권 국가 중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지요?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개의 자치권을 가진 국가가 모여 만들어진 연방공화국이었는데요, 1991년 6월 그 여섯 개의 국가 중 하나였던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 연방과의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자 크로아티아 지역 내에 있던 세르비아 계의 주민들이 자신들을 별도로 독립시켜 주거나 아니면 세르비아로 편입시켜 달라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이들은 결국 유고 연방군과 손을 잡고 크로아티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크로아티아 내전’입니다. 5년간에 걸친 이 전쟁은 UN이 개입하는 등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1995년 크로아티아 정부와 크로아티아 지역 내 세르비아 계 주민간의 휴전협정 체결로 인해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구 유고연방은 해체되고 지금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리고 신 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로) 이렇게 다섯 개의 나라로 쪼개졌답니다.

당시 크로캅의 마을은 세르비아의 국경에 가까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포격에 의해 불타 오르는 마을의 모습을 보며 크로캅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합니다. 특수부대의 일원이었던 그는 살아남기 위해 강한 육체를 가져야만 했고, 적과 목숨을 건 상황에서 이기기 위하여 냉철한 판단력을 지녀야만 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가 ‘실전에서는 속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침착하고 대범한가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크로캅이 링 위에서 언제나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적과의 숨막히는 순간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5년이란 긴 시간이 흘러 전쟁은 끝이 났지만, ‘장 끌로드 반담’은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영웅이 아니었고, 이때부터 전쟁을 통해 전사로 거듭난 크로캅의 “His way”가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크로캅은 특수부대 재직 시절부터 수련해왔던 복싱에 더욱 매진하여 점점 민첩하고 기술이 뛰어난 복서로 완성되어 갑니다. 그의 아마추어 복싱 전적을 살펴보면 45전 40승 5패에 KO승을 무려 31번이나 거두었으니 복싱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임은 분명하지요. 그런 뛰어난 실력을 인정 받아 대 테러진압의 임무를 띤 특수경찰의 무술 교관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그의 이름도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크로캅이 복싱만 수련한 것은 아닙니다. 태권도, 가라데, 합기도와 킥복싱 등의 무술을 두루 섭렵하던 크로캅은 1996년 처음으로 풀 컨택트 대회에 참가해 헤비급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이 대회는 서울에서 열렸다고 하는데, 명칭은 I.K.B.F가 아니었나 추정되네요. (당시 자료를 못 찾겠더군요. 정확한 명칭을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길.) 단 두 번의 킥복싱 시합으로 챔피언이 된 크로캅은 곧바로 K-1 무대에 오르는 행운을 잡게 됩니다.

그는 1996년 3월 10일, 도쿄에서 열린 K-1 World GP 1996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의 예선 첫 상대는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Jerome Le Banner였습니다. Banner가 이제 막 K-1에 입성한 신출내기에게 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는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캅은 이 경기에서 Banner를 다운시키는 등 우세한 경기를 펼친 끝에 판정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키며 K-1 팬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비록 8강에서 KO패를 당하면서 4강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KO를 안겨준 상대가 ‘Mr. Perfect’로 불리는 Ernesto Hoost였기 때문에, 크로캅으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K-1 무대에 데뷔한 셈이었다 할 수 있겠지요. Hoost와는 그 후에도 두 번 더 경기를 했지만 한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고비마다 매번 발목을 잡힌 셈이라서 크로캅으로서는 Hoost가 악연으로 느껴질 만도 하겠네요. 어떤 선수마다 “천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본다면 K-1 무대에서 크로캅의 천적은 바로 Hoost임에 분명합니다. 참고로 그 대회에서는 Andy Hug이 Mike Bernardo를 KO 시키며 96년 GP 챔피언으로 등극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가 낳은 걸출한 파이터하면 지금은 크로캅이지만, 그 원조는 바로 Branco Cikatic 입니다. Cikatic은 1993년 초대 K-1 GP 챔피언을 역임한 바 있을 정도로 K-1 대회 출범 당시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킥복서였는데, 크로캅의 스승이 바로 이 Cikatic인 것이지요. 크로캅이 K-1에 데뷔할 때에는 Mirko ‘Tiger’ Filipovic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이 타이거란 이름은 아마도 당시 Cikatic이 운영했던 “Tiger Gym”에서 따온 것으로 유추되는데, 후에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의 이미지를 살린 Cro-Cop으로 자신의 예명을 바꾸게 된 후부터 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었으니까 ‘크로캅’이라는 이름은 아마 점집에서 복채를 많이 주고 작명을 한 모양이네요. ^^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93년 GP 대회 8강전에서 Cikatic에게 KO를 당한 선수가 바로 Hoost였다는 것이고,1년 뒤 Cikatic은 다시 한번 Hoost에 KO패를 선사했으니, Hoost의 천적은 Cikatic이었던 셈인가요? 그렇다면 Hoost는 스승에게 하지 못한 복수를 애꿎은 제자에게 한 셈이 되는 거네요. 아무튼 승부의 세계는 이래서 더 재미있습니다.




크로캅이 K-1을 대표하는 격투가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99년 World GP를 통해서였습니다. 16강 전에서 쉬크 면도기 모델로 우리에게 친숙한 “강타자” Mike Bernardo에 전광석화 같은 레프트 하이킥을 먹여 TKO 승을 일궈내며 GP Final에 진출하더니, “스텔스 펀치(?)” 무사시와 “가라데 마스터” Sam Greco를 연파하며 파죽지세로 결승에 안착합니다. 결승전의 상대는 바로 Ernesto Hoost.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크로캅은 Hoost의 주먹에 다시 한번 분루를 삼키고 말았지만, GP 준우승이라는 업적을 이루어냈기에 비로소 K-1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인정 받기 시작한 거죠. 그 후 크로캅은 2000년 K-1 World GP 후쿠오카 대회에서 2위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Andy Hug, Mike Bernardo, Ernesto Hoost 등 이름난 선수들에게 패하기도 했지만(3패), Peter Aerts를 비롯하여 Glaube Feitosa, 아마다 히로미 등의 선수들에게 더 많은 승리를 거두며(6승), 적어도 K-1 GP Finalist(8명)에는 들 수 있는 안정된 기량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던 그에게 돌연 시련이 찾아 왔으니……

때는 바야흐로 2001년 6월, 호주 멜버른에서는 “연말(年末) GP Final로 직행하는 티켓 한 장”을 걸고 여덟 명의 선수들이 겨루는 ‘K-1 멜버른 GP’가 펼쳐지게 되었고 크로캅은 Hoost, Hunt, 아마다 히로미 등과 함께 티켓을 얻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당시 대회의 분위기는 크로캅과 Hoost가 결승에서 만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로캅 역시 자신에게 이미 세 번이나 패배를 안겨준 Hoost와의 경기에 초점을 맞추고 대회를 준비해온 것이 사실이었고요. 그 상황에서 크로캅의 8강전 첫 상대는 당시 36세의 캐나다의 노장 ‘Michael McDonald’.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는 많은 수의 크로아티아 교민들이 이 날 경기를 보러 경기장을 찾아서 엄청난 환호성으로 크로캅을 응원했으며, 그 기세를 등에 업어서였는지 크로캅은 경기 전 다소 건방진 태도로 Mcdonald를 응시합니다. 하지만 ‘방심’은 결국 ‘후회’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1라운드 시작하자마자 McDonald의 훅에 제대로 걸리면서 크로캅은 다운을 당했고, 카운트 “8”에 일어나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기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결국 다시 한번 다운을 당하며 McDonald의 승리로 경기는 끝났고, 이 경기는 2001년 K-1 최고의 업셋(Upset, 예상을 뒤엎은 경기)으로 기록됩니다. 수많은 크로아티아 교민들은 침묵했고, 크로캅 자신은 망연자실한 채 인터뷰를 거부하고 경기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패배와 GP Final 진출 좌절이라는 두 가지 사실 속에서 괴로워하던 크로캅에게 K-1이 제의한 것은 바로 같은 해 8월에 개최되는 ‘K-1 Andy Hug Memorial’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회는 여러 가지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는 대회로서, ‘K-1 Japan GP 8강 토너먼트’ 경기들과 Andy Hug 추모 두 경기, 그리고 ‘K-1 vs 이노키’의 세 경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K-1 vs 이노키’ 경기는 각 단체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승부를 가린다는 취지였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K-1룰이 아닌 MMA룰로 승부를 치른다는 점이었습니다. 크로캅에게 제안된 경기는 바로 이 MMA 경기였고, 상대는 이노키 군(軍)의 에이스 후지타 가즈유키였던 것입니다. 당시 후지타는 PRIDE에서 3연승을 기록 중이었으며, 크로캅이 그라운드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레슬러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크로캅의 입장에서는 경기를 수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크로캅의 첫 MMA 경기는 이렇게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크로캅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크로캅의 두 다리를 노리고 낮은 태클을 들어가는 후지타의 안면에 크로캅의 무릎이 작렬했던 거지요. 최강 두개골의 후지타는 충격을 참아내고 상대를 테이크다운 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내 눈 쪽의 부상을 확인한 레프리에 의해 경기는 중단되었고, 더 이상의 경기진행은 불가하다는 닥터의 판단에 의해 크로캅은 첫 MMA 경기를 TKO 승으로 장식하게 됩니다. 다음해 후지타는 ‘Inoki Bom-Ba-Ye 2002’에서 크로캅에게 패배를 설욕하려 했으나 판정에 의해 다시 한번 패함으로써 복수에 실패하게 됩니다.




McDonald전 패배와 후지타전 승리는 크로캅에게 있어서 격투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MMA 경기에서 강한 상대를 만나 비교적 손쉽게 첫 승을 따낸 크로캅은, 이후에도 일정기간 동안 입식타격(K-1)과 종합격투(PRIDE or Inoki) 경기를 오가며 시합을 치르면서 종합격투가로서의 변모를 꾀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Wanderlei Silva와의 무승부(PRIDE 20)와 사쿠라바 가즈시에게 거둔 TKO승(PRIDE Shockwave)은 그의 종합격투가로서의 변신에 한층 탄력을 받게 하였는데, 비록 자신보다 다소 가벼운 선수였다 할지라도 상대는 PRIDE 미들급 최강을 다투는 탑 파이터들이었으므로 크로캅으로서는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또한 크로캅은 그 기간 동안 Mark Hunt, Remy Bonjasky 같은 입식타격의 탑 파이터들을 이기며 K-1에서도 승수를 쌓아가고 있었으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당시 K-1이 밀고 있는 최고의 아이콘은 바로 “The Beast” Bob Sapp이었습니다. 근육질의 엄청난 덩치를 바탕으로 타고난 힘과 체격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괴물의 등장에 팬들은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에 있어선 완벽하다’고 평가 받는 Hoost마저 Bob Sapp에게 두 번이나 연달아 패하면서 ‘기술을 제압하는 건 힘’이라는 공식은 점점 더 굳어져가고 있었지요. 그러나 오랜 기간 갈고 닦지 않은 밑천은 금방 들어나게 되어 있는 법, Sapp의 ‘무차별 과속 질주’를 저지한 이는 바로 ‘경찰’ 크로캅이었습니다. 2003년 3월 ‘K-1 Saitama GP 2003’에서 펼쳐진 이 경기에서 기회를 노리던 크로캅은 1라운드 1분 26초 만에 왼발 미들 킥에 이은 왼손 스트레이트 단발로 Sapp을 쓰러뜨립니다. 흔히 ‘고목나무 넘어지듯 넘어진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딱 그 표현 그대로 ‘쿵’하고 쓰러진 Sapp은 눈 밑이 골절되어 고통에 신음했고,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나 버렸습니다. 실로 전광석화와 같은 깔끔한 일격필살(一擊必殺)에 팬들을 환호했고, Sapp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울면서(그래서 ‘밥샵은울보’인 거죠.) 링을 내려왔습니다. 이 경기로 인해 K-1에서의 크로캅의 주가는 한층 치솟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이를 마지막으로 K-1을 떠나 현재까지 PRIDE에서만 종합격투 룰로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요.




크로캅은 2003년 6월 PRIDE26에서 당시 헤비급 Big3로 군림하고 있던 ‘텍사스의 광마’ Heath Herring을 상대로 지목하며 “K-1과 PRIDE를 동시에 제패하겠다.”라고 공언합니다. 이 말을 들은 Herring은 콧방귀를 뀌며 “K-1이나 제패한 뒤 이야기해라. PRIDE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라며 진정한 종합격투의 무서움을 보여 주겠노라 장담했지만, 실제 경기에선 오히려 크로캅 킥의 무서움만 맛보고 말았죠. Herring의 태클 시도를 매번 잘 막아내며 기회를 엿보던 크로캅은, 들어오는 상대의 복부에 연이어 미들킥을 성공시키며 승기를 잡습니다. 결국 강력한 미들킥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Herring의 안면에 무차별적으로 크로캅의 파운딩 펀치가 쏟아지자 결국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켰고, 크로캅은 PRIDE 헤비급 Big3에서 Herring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서는데 성공합니다.




Herring에게 승리를 거둔 후, ‘북에서 온 최종병기’ Igor Vovchanchyn과 ‘복면의 프로레슬러’ Dos Caras Jr. 등을 연파하며 기세가 등등해진 크로캅은 당시 PRIDE 헤비급 챔피언 Emelianenko Fedor와의 대전을 공공연히 요구합니다. DSE 측에서도 두 선수간 챔피언 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며 대전이 가시화되고 있던 무렵, 돌연 Fedor가 주먹에 골절부상을 입어 시합을 뛸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결국 DSE측에서는 Fedor와의 경기 대신, 전(前) PRIDE 헤비급 챔피언 Antonio Rodrigo Nogueira와의 경기를 추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크로캅 측에서는 “Fedor가 도망쳤다”며 흥분했지만, Nogueira 측에서는 “무슨 소리냐? Fedor에게 도전하려면 당연히 나를 이기고 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대전을 수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결국 크로캅은 울며 겨자 먹기로 Nogueira와의 경기를 받아 들입니다.

Nogueira와의 경기 초반 크로캅은 자신의 장점인 스탠딩 타격 능력을 잘 살리면서 경기를 우세하기 이끌어 나갑니다. 1라운드 내내 침착하게 킥과 펀치를 상대에게 적중시키며 경기를 지배해 나가던 크로캅, 그러나 단 한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부르고 말았죠. 자신을 가드로 끌어들이려는 Nogueira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1라운드를 잘 운영했던 크로캅이, 웬일인지 2라운드 들어서자마자 Nogueira에게 쉽게 테이크다운을 허용하며 풀 마운트 포지션까지 빼앗기고 만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마운트 포지션에서 Nogueira는 계속해서 펀치를 날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크로캅은 성급하게 스윕을 시도하다 오히려 상대에게 한 팔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주짓수 매지션의 리버스 암 바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것이었고, 크로캅은 난생 처음 탭을 치며 패배를 인정합니다. 경기 후 패배한 크로캅의 얼굴은 말짱했던 반면, 승리한 Nogueira는 코뼈가 골절되고 오른팔 뼈에도 금이 가는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 크로캅의 입장에서는 다 잡았다가 놓친 아쉬운 경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Sapp과의 경기에서도 그랬듯이 실컷 두들겨 맞다가 단 한번의 기회로 역전승을 일구어 내는 것 또한 Nogueira의 특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별명이 “Minotauro”인 것이고요. 어쨌거나 비록 승자와 패자는 갈렸지만 양 선수 모두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는 찬사를 들을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2003년 11월, 비록 Nogueira와의 경기에서 아쉽게 패배했지만 크로캅에게는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11월 23일 실시된 크로아티아 총선에 사회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된 것이었죠. 선거 전 크로캅이 내건 공약은 ‘경찰관의 처우 개선과 마약의 박멸, 빈곤의 퇴치와 스포츠 선수의 지위향상’ 등이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가를 꿈꾸었다는 크로캅은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전혀 없으며 여전히 나는 격투가”라고 말했답니다. 여담이지만 크로캅의 국회의원 수입은 불우아동들에게 꼬박꼬박 기부되고 있다고 하네요. ^^

국회의원이 된 크로캅은 세달 후인 2004년 2월 13일에, 크로아티아 국회의원의 자격으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16분간 이루어진 이 회담에서 크로캅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일본의 대 크로아티아 경제 지원’ 등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회담을 마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은퇴한 장래에는 크로아티아의 총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현재 국회의원의 신분에 맞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겠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드러냈다고 하네요. 한가지만 잘 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에서 참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Nogueira와 경기에서 드러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트레이닝에 박차를 가하던 크로캅은 Ron Waterman과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화끈한 TKO로 물리치며 헤비급 챔피언을 향한 재시동을 겁니다. 특히 Mark Kerr와의 경기에서 행운의 승리를 거두고 나서 ‘크로캅이건 뭐건 덤벼라. 나의 DDT를 보여주마’라며 자신에게 도발을 서슴지 않던 야마모토와의 대결에서 그는, 평소와 같지 않은 격앙된 표정으로 상대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크로캅도 감정이 있었구나’하는 생각과 동시에 ‘저러다 야마모토 녀석 죽는 거 아닌가’하는 걱정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야마모토는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초 사이어인으로 변신한 크로캅의 사커 킥에 죽다 살아났고, 눈 앞에 아른거렸던 ‘2004 PRIDE 헤비급 GP’ 티켓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헤비급 타이틀을 간절히 열망하던 크로캅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04 PRIDE 헤비급 GP가 바로 그것이었는데요, 모두 열여섯 명의 헤비급 선수들이 겨루는 이 토너먼트에서 크로캅의 첫 상대는 바로 ‘돈 킹콩’ Kevin Randleman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로캅에게 돈 킹콩쯤은 대수로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나 봅니다. 경기를 준비하는 두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크로캅은 고이즈미 총리를 방문했고, “얼티밋 세븐”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연하며 트레이닝에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죠. 훈련의 부족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정신적 해이였습니다.

크로캅이 Randleman의 펀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총 1분 57초였습니다. Nogueira에게 탭을 치며 패배를 맛봤던 크로캅이지만, 같은 패배라 할지라도 이건 차원이 틀린 이야기였습니다. 언제나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크로캅이 상대의 펀치에 몽롱한 의식으로 기절하고 말다니요.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그가 얼마나 큰 굴욕감을 느꼈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요. 크로캅은 이 경기 후 일본의 한 잡지에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나는 ‘K-1 2001 멜버른 GP’에서 McDonald에게 당한 충격의 패배 이후 다시 한번 구역질이 날 정도의 후회를 하며 락커룸을 향하게 되었다. 세계 최강을 향한 약육강식의 토너먼트의 장에 오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난 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영화나 찍고 있었으면서 상대는 나를 쓰러뜨릴 무기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가. 초심으로 돌아가자. McDonald에게 패한 뒤 후지타와의 경기를 준비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기다려라, Fedor, Nogueira. 곁눈질 하지 않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려, 반드시 너희들의 꼬리에 다시 한번 따라붙어주마. 올해의 섣달 그믐날까지.”





초심(初心)으로 돌아간 크로캅은 이후 가네하라 히로미츠, 오야마 슌고 등의 일본인 파이터들을 차례차례 물리친 뒤, Fedor의 동생 Aleksander Emelianenko 역시 왼발 하이킥에 이은 파운딩 마무리로 KO 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연승행진에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상 복귀에 최대 난항으로 여겨졌던 “동안(童顔)의 암살자” Josh Barnett과의 경기에서도 Barnett의 어깨부상으로 인한 행운의 승리를 따내며 4연승째를 기록하여, 이제 Randleman과의 리벤지 매치와 Fedor의 타이틀 매치, 두 가지만이 그의 목표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 크로캅은 2004년 8월 Aleksander에게 승리를 거둔 직후, 크로아티아 2부 리그에서 크로캅의 고향인 프리브라카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에 입단하기도 했다는데요, 들리는 바에 의하면 2년 전 크로캅은 크로아티아 전 축구국가대표 보반의 은퇴시합에 출전하여 2골 1어시스트의 맹활약을 보일 정도로 축구 실력 또한 뛰어나다고 합니다. K-1 & PRIDE 올 라운드 플레이어에 국회의원, 게다가 축구선수까지 한다니 넘치는 그의 재능에 짜증이 좀 나기도 하네요. ^^;;





Randleman에게 복수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작년 12월 31일 ‘PRIDE 2004 男祭 – SADAME’에서 Randleman의 리벤지 매치가 성사된 것이죠. 이 경기에서 크로캅은 태클을 들어오는 Randleman의 목을 잡고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길로틴 쵸크를 성공시켜, 생애 첫 서브미션 승리를 깔끔하게 거두며 상처 받은 자존심을 만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돈 킹콩의 몸이 힘없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한 때 스탠딩 타격만을 고집했던 크로캅이 그라운드 기술을 보강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추측할 수 있었고, 크로캅에게 그 동안 다가왔던 몇 번의 시련이 오히려 그를 더 완벽한 종합격투가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크로캅은 얼마 후 2월 20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리는 PRIDE 29 참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의 상대는 해머 하우스의 수장 Mark Coleman! 그는 크로캅이 이제껏 상대했던 레슬러 중 가장 뛰어난 선수이기에 크로캅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가 될 전망입니다. 두 번에 걸친 Randleman과의 경기로 인해 두 선수의 감정은 매우 안 좋은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크로캅은 일단 이렇게 말합니다. “Coleman은 매우 뛰어난 격투가이기에 그와 꼭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이게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라는 건 알지만, 나로서는 2005년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은 생각이 있고 자신도 있다. 나는 그를 오래 전부터 존경해왔고, 내가 PRIDE 무대에 오르기 이전부터 그의 경기를 보아왔으므로 좋은 경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크로캅은 Coleman이라는 최고의 레슬러와의 경기를 통해 자신의 약점으로 지적되어 온 ‘레슬러 파해법’을 완성시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그가 Randleman에 이어 Coleman까지 꺾는다면 지난 해 Fedor가 밟아온 전철을 그대로 되 밟는 셈이어서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지겠군요. (이긴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죠.)





이제 Mirko “Crocop” Filipovic는 ‘Fedor Emelianenko’라는 목표를 앞두고 ‘Mark Coleman’이란 최종 리허설을 성공리에 끝마치고자 합니다. K-1 파이터로서 종합격투 룰에 완벽히 적응하여 어느덧 PRIDE의 정상까지 넘보고 있는 크로캅. ‘신(神)은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한다’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줄기차게 노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몇 번의 시련을 겪은 끝에 이미 깨우쳤기에 진정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K-1에서나 PRIDE에서나 최 정상급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의 자리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무관의 불운을, 그가 과연 2005년에는 극복해낼 수 있을지 매우 기대됩니다.


Fanta 이민우 기자 (minu@naraesys.co.kr)
출처 : 쌈박질클럽(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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